[월드 인사이드] 스탈린은 왜 종교를 말살하려 했을까
[월드 인사이드] 스탈린은 왜 종교를 말살하려 했을까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1.05.0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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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 모습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 모습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종교는 사회주의 번영의 방해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산당 선언문」의 공동저자인 칼 마르크스가 선언했듯이 “공산주의는 무신론이 싹트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본 것이다.

소련의 두 번째 통치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대중에게 호전적인 무신론을 강요했다. 그는 ‘새로운 사회주의자’는 계급의 압제에 얽매이도록 만드는 종교의 사슬에서 벗어난 무신론자여야한다고 강조했다.

1928년부터 종교 통제가 일부 완화된 2차 세계대전까지 전체주의적인 독재자 스탈린은 종교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기 위해 기독교 교회, 유태교 회당, 이슬람 사원들을 폐쇄하고, 수천 명의 종교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스탈린은 무신론적 주장을, 사람들을 붙잡는 과거를 제거하고 과학과 진보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방편의 하나로 보았다.”

역사학자 스티븐 메리트 마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스탈린의 성전 : 종교, 민족주의, 그리고 동맹정치」의 저자이다.

“스탈린 통치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레닌 시절의 폭력을 강화했다.”

종교와 함께 자란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은 개인적으로는 교회와 친숙했다. 그는, 조지아 태생의 젊은이로서, 처음에는 한 가톨릭 신학교에서 퇴교당한 후 또 다른 신학교에 다니다가 불온서적 소지 혐의로 체포되고 나서는 이 학교마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신학생이었던 스탈린은 점점 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보편적 진리라는 측면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이던 마르크시즘은 그에게 거의 종교처럼 느껴지며 거부할 수 없는 매혹으로 다가왔다고, 2015년 「한 독재자의 전기」를 펴낸 올레그 클레브뉘크는 말한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결국 사회주의라는 상위단계로 이어진다는 사상은 매력적인 전망이었으며, 혁명 투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념이었다고 올레그 클레브뉘크는 적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적은 가장 극단적인 수단조차 정당화하고도 남는다.

1920년대 스탈린의 권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의 러시아정교회는, 레린 치하 10년 이상의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처드 매드슨은 「공산주의 역사의 옥스퍼드 편람」에서 러시아 농부들이 전과 다름없이 기독교 신앙에 충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예배가 여전히 생활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기독교는 공동체와 삶의 의미에 없어서는 안 될 종교였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권위를 공산주의의 앞날의 장애물로 보고, 혁명의 성공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 걸림돌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 철폐 5개년 계획

1928년 개시된 ‘종교 철폐 5개년 계획(Godless Five-Year Plan)’은 ‘무신론 전사 동맹’이라는 단체의 각 지역 세포 요원들에게 종교를 말살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교회는 폐쇄되었고, 재산을 빼앗겼으며, 단순한 예배를 넘어서는 어떤 교육 및 종교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투옥되고, 때에 따라서는 처형되기도 했다. 그리고 몇 남지 않았던 성직자들은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대체되었다. 반체제와 반혁명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교회를 이빨 빠진 호랑이이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리처드 매드슨은 이 계획의 핵심에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즉, 사회주의라는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의식’을 근절해야한다는 목표가 그것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같은 조치는 소비에트연방(USSR)을 닮고자 하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 복제·전파되었다.

실제 생활에서는 사회 개혁과 무신론을 지지하는 출판물들이 출간되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종교 없는 삶을 강요하고 들었다. 1929년에 배포된 새로운 소비에트 달력은 주말을 없앰으로써 노동의 개념에 혁명을 도입하기 위해 처음에는 일주일을 5일 단위로 표기했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목표였을 뿐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금, 토, 일요일을 없앰으로서 무슬림과 유태인,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을 폐지하려는 것이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러시아정교회 주교회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정교회 주교회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무신론 박물관으로 변한 기독교 교회, 유태교 회당, 무슬림 사원들

이와 동시에 약탈당한 기독교 교회, 유태교 회당, 무슬림 사원들은 반종교적인 무신론 박물관들로 변모해갔다. 이러한 박물관들에서는 과학에 대한 찬양과 함께 과거 성직자들의 잔혹함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해설되곤 했다.

또, 종교적 상징물과 유물들도 신비를 벗고 보통 물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관람을 즐기면서도 이러한 전람에 동요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박물관들 중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곳 하나가 1980년대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명목상으로는 정부로부터 독립되어있던 ‘무신론 전사 동맹’은 반종교적인 출판물들을 배포하고, 강연과 군중대회를 주동하는 등 무신론이 사회주의자들의 모든 생활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홍보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출판물들이 인기를 끌었다고 해서 곧바로 무신론이 승리를 쟁취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스티븐 메리트 마이너는 말한다.

“일부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무신론 출판물들을 사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다시 열린 교회

1939년이 되면 러시아혁명 이전에 약 46,000곳에 이르던 교회들이 200개 정도 간신히 남게 된다. 대부분의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처형되거나 노동교화소로 보내지고, 4명의 주교만이 자유를 유지하고 있었다.

리처드 매드슨은,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할 때쯤이면 정교회는 거의 진압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치 침략군들이 지방 민중들에 대한 선무공작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의 교회를 개방하자 스탈린도 나치를 따라서 조국애를 북돋우기 위해 소비에트 전역에서 교회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스탈린은 종교 말살 전쟁에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고 확신한다.”

스티븐 메리트 마이너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는 종교는 쓰레기이며 웃기는 짓이라고 여겼고, 민중들을 통제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방편이라고 믿었다. 그는 정말로 뭔가를 믿는 것은 유치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가 종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애버렐 해리먼에게 “저렇게 똑똑한 대통령이 정말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정치라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다수를 무신론자로 만드는 데 실패한 종교 말살 정책

스탈린의 종교 말살 조치들이 러시아정교회의 중심부를 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실제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37년이 되었는데도 소비에트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57%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답을 했다.

스탈린의 핵심 노선, 즉 스티븐 메리트 마이너의 말대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린아이가 커가면서 장난감을 버리듯 종교적 미신을 탈피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잘못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종교 말살 정책은 수십 년간 여세를 몰아갔다. 성경은 금서였으며, 어떠한 종교 교육도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뉴욕타임스는 “소비에트 관리들이 자신들이 종교와의 싸움에서 졌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문화적으로 본다면, 도시 볼셰비키들은 일반 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골 농민들과 공감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농민들에게, 호전적인 무신론은 수세기를 이어온 종교 활동을 대신할 매력적인 사상이 된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7년 혁명과 스탈린 통치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가면서는 무신론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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