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사이드] 코로나19, 미국도 노사갈등 심화... 1920년대 미국 노동운동이 쇠퇴한 이유 보니
[월드 인사이드] 코로나19, 미국도 노사갈등 심화... 1920년대 미국 노동운동이 쇠퇴한 이유 보니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1.02.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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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미국에서 일어난 최저임금 인상 요구 시위.(AP가 유튜브에 올린 리포트 갈무리)
미국에서 일어난 최저임금 인상 요구 시위. [AP=연합뉴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미국에서도 노사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경제공황과 노사 갈등, 노동 투쟁은 깊은 상호 역학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1920년대는 미국 노동운동의 시련기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노동운동이 세력을 키우자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면서 노동 갈등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됐다. 20세기 초반 20년 동안 전개된 진보의 시대에 세력을 확장한 노동운동 조직은 1차 세계대전 동안 그 힘이 더 커졌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차 세계대전에 집중하는 동안 파업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운동에 우호적인 손길을 보냈다. 노동조합은 파업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근무 일수의 축소, 단체교섭권의 확대 같은 특혜를 받았으며, 노동 분쟁을 조정하는 ‘국가 전시 노동위원회(NWLB)’의 고위직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 미국 최대의 노동운동 단체인 ‘미국 노동총동맹(AFL)’의 조합 가입률은 1917년과 1919년 사이 50%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노동운동은 설 자리를 상실했다. ‘국가 전시 노동위원회’는 해체되었으며, 미국의 재계는 노동계에 내주었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1918년 11월 휴전협정이 조인되자마자 재계의 노동운동에 대한 반발이 본격화되었다.”

조지타운 대학 노동운동 역사가인 조셉 맥카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1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해 증대된 노동자들의 기대치는 높아만 갔으며, 자신들의 기대 수준을 낮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1919년 미국 역사상 최대의 노동 투쟁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런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1919년 미국을 뒤흔들어놓았던 노동 투쟁

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달간 찾아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미국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1915년과 1920년 사이 식료품 가격은 두 배 이상, 의복 가격은 3배 이상 치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에 합당한 임금인상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19년 노동자 4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3,500건 이상의 파업이 일어났다. 그해 2월에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동맹파업이 시애틀에서 벌어졌다. 35,000명의 시애틀 조선소 노동자들과 연대한 노동조합 단체들이 조업을 거부한 것이다. 또, 가을에는 전미 광부노조(UMWA)원 4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중서부 지역에서는 365,000명의 철강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목표로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이 얻은 실익은 별로 없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배급과 물자 부족을 겪고, 1918-1919년의 스페인 독감을 경험하면서 피로감이 쌓인 미국 대중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가는 노동계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보스턴의 경찰들까지 파업을 벌이자 안보 불안이 커지면서 대중들의 노동자 파업에 대한 인식은 더욱 싸늘해졌다.

”1919년 기획되었던 철강, 전기제조, 육류 도축 업계 노동자들의 대규모 노동 투쟁이 노동운동 파괴 공작에 의해 분쇄되자 전체 노동계는 수세로 접어들면서 192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셉 맥카틴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2014년 미국 맥도날드 본사서 열린 시급인상 시위(AP=연합뉴스DB)
2014년 미국 맥도날드 본사서 열린 시급인상 시위(AP=연합뉴스DB)

1920년대 노동운동 계를 갈라놓은 레드 콤플렉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도 공산주의가 발호하자 많은 미국의 중상류층은 노동조합 운동과 볼셰비키즘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았다. 일부 사람들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자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기업가들은 노동조합원들에게 미국의 반역자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1919년의 철강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산업현장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급진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산업 전쟁이다.“

이러한 우려는 1919년 봄 폭탄을 동봉한 편지들이 정부 관리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노동조합의 적이라고 치부된 인사들 앞으로 배달되면서 증폭되었다. 그리고 1920년 9월 16일 월스트리트의 J.P. 모건 본사 밖에서 폭발장치가 터져 3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드 콤플렉스 정서에 따라 노동운동 자체도 매우 보수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역사학자인 넬슨 리히텐스타인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미숙련 이민 노동자들의 급진화 가능성 때문에 ‘미국 노동총동맹(AFL)’과 숙련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들은 보수화되면서 숙련 노동자들과 종래의 보수적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이 흘러가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인종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으며, 철강업계와 같은 많은 대규모 공장의 노동자들은 상당수가 이민자들이었다.“

리히텐스타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민자들을 조합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산업별 노동조합에 대한 숙련공 중심의 개별 노조들의 적개심이 192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재계의 손을 들어준 법원

미국인들은 1920년 워런 하딩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정상으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하딩은 1920년대 백악관을 점령한 공화당 출신의 친재계 대통령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일련의 진보적 대통령을 거친 후 주도권이 다시 한번 재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산업입니다.“

1923년 하딩이 사망하자 자리를 물려받은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했다.

1920년대를 꿰뚫으면서 법원이 파업과 피켓 시위 등의 노동운동을 금지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1922년 ‘철도 노동위원회(Railroad Labor Board)’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자 40만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을 때 법무부장관 해리 도어티는 전국적인 파업을 제압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금지명령을 얻어낼 수 있었다.

”본인이 미국 정부를 대변하는 만큼 노동조합들(유니온샵 노조 단체들)이 오픈샵 노조(노동조합 가입이 의무가 아닌 노조)들을 파괴하는 일을 정부의 권한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막겠습니다.“

해리 도어티 장관은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대법원도 1920년대 노동계에 불리한 판결을 연달아 내렸다고 조셉 맥카틴 교수는 말한다.

1920년대 노동운동이 사그라들면서 유니온샵 제도를 채택한 노동조합들이 5백만 곳에서 3백만 곳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재계의 수익은 급증했다. 1920년대의 10년 동안 축적된 부(富)는 남북전쟁 이후의 황금시기(Gilded Age)를 연상하게 했다. 대략 200개의 기업이 국가 총 기업 재산의 반을 차지했다. 미국 최대 기업 U.S. 스틸의 이익이 1924년에서 1929년 사이 두 배로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단 한 번의 단일임금 인상을 제공받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기점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펼치면서 노동자 조직은 다시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뉴딜정책이 노동운동을 보호하면서 노동조합 가입에 돌파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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