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사이드] 역사에 가려진 미국의 신화... 필그림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행을 결행한 진짜 이유는
[월드 인사이드] 역사에 가려진 미국의 신화... 필그림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행을 결행한 진짜 이유는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11.20 0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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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종교적 피난민들이 아니라 경제적 이주민들이었다
메이플라워 호, William Halsall, 1882(Wikimedia Commons)
메이플라워 호, William Halsall, 1882(Wikimedia Commons)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 그리고 강대국의 역사는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 강대국의 성장 신화는 더욱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민망한 역사는 묻혀지곤 한다.  

오늘날 전세계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역사 가운데는 실제와 왜곡되어 알려진 사례가 수없이 많다. 미국의 건국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필그림 파더스’는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건너가 플리머스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을 가리킨다. 필그림(Pilgrim)들이 험난한 대서양을 가르며 미국행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강력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종교적 박해는 그렇게 큰 구실이 아니었다.

필그림들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있지만,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 영국 국교회로부터 이탈을 추구하는 청교도들)의 물결은 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기 10년도 전에 이미 그 기세가 잠잠해져 있었다.

필그림의 일원이었던 에드워드 윈슬로우에 따르면, 필그림들은 1608년 영국을 탈출한 이후 네덜란드의 레이던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훨씬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필그림들은 네덜란드에서 이미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굳이 미국행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주식회사 신세계 : 영국 모험 상인조합에 의한 미국 건국』의 저자 사이먼 타겟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그림들이 신세계를 향해 위험한 항해를 결행한 데에는 다른 이유를 들여다보아야하는데, 바로 거기에는 경제적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필그림들은 네덜란드 정착지에서 빈곤과 실망감에 좌절했다

필그림들은, 그 이후 그들의 뒤를 따랐던 수만 명의 추종자들처럼, 경제적 이주자들이었다.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섬유 산업에 10년이 넘게 종사했지만 필그림들은 종교적 자유 이상의 것들을 누릴 수는 없었다.

초기 정착 필그림 농민들은 가난했고, 섬유 공장에서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이 같은 곤궁함 때문에 초기 필그림들은 종교적 자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뒤를 따르려는 분리주의자들에게 레이던으로 오라고 선뜻 추천할 수가 없었다.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은 종교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네덜란드에서 곤궁함을 견디느니 그냥 영국에서의 감옥살이를 선택했다.”

필그림들의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렇게 증언했다.

양모 시장의 붕괴로 필그림들의 경제 여건이 더 암울해지는 찰나에 유럽에 찾아든 30년 전쟁과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맺어졌던 12년간의 휴전협정이 곧 종결된다는 소식은 필그림들의 정착지에 일대 혼란을 야기했다.

또, 필그림들은 자신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반면에 후손들이 네덜란드의 세속적 분위기에 휩쓸릴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네덜란드가 종교적 자유를 주었지만, 자신들의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영국적인 정체성을 상실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브래드포드는 다음과 같이 염려를 표시했다.

“우리의 상당수 자녀들이 레이던의 여러 유혹에 굴복하고 있으며, 사악한 것들에 이끌려 사치와 위험스런 행동에 빠져들고 있다.”

“필그림들은 자녀들이 네덜란드 시민이 아니라 영국 시민이기를 바랐다.”

사이먼 타겟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필그림들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이라는 신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영국 상인들이 이미 수십 년 동안 식민지 개척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가면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안정과 영국 정체성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필그림들은 신세계에 가면 미국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브래드포드가 표현한 대로 그들은 ‘그 외딴 지역에서 예수그리스도 왕국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출발을 위해 메이플라워 호를 기다리는 영국 청교도들(Wikimedia Commons)
출발을 위해 메이플라워 호를 기다리는 영국 청교도들(Wikimedia Commons)

돈벌이 사업에 합류한 필그림들

이윤을 추구하는 영국 기업들은 상업적 전초기지인 미국 제임스타운에 ‘버지니아 컴퍼니’가 설립한 것과 같은 회사들을 세워나갔다. 이재(理財)에 밝은 영국 내의 투자자들은 필그림들이 결속력이 강하고 부지런하며 근면하다는 데 주목하고 신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적격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필그림들이 ‘버지니아 컴퍼니’로부터 그들의 관할구역 내에 정착지를 건설할 특허를 획득하자 ‘모험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이라 불리는 70명의 사업가들이 자본을 댔다. 이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마련하고 승무원 및 1년간의 필요 물자에 대한 돈을 댔던 것이다.

‘모험 상인조합’은 자신들의 투자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필그림들이 미국에 정착한 7년 이내에 이득을 가져다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필그림 이주자들은 정착지로 떠나 땅을 새롭게 일군다는 명목으로 한 명당 회사 주식 한 주씩을 받았다. 이 주식은 7년 계약 종료 후에는 필그림 이주자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다.

한편, 필그림들은 항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적 목적의 상인들을 메이플라워 호에 함께 승선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들의 분리주의적 종교 신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선택이었다.

필그림들은 이 상인들을 ‘방문객들(strangers)’이라고 불렀다. 상인들은 메이플라워 승선 인원의 반을 차지했다.

1620년 11월 메이플라워 호가 매사추세츠 주의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이 상인들이 자신들은 더 이상 ‘버지니아 컴퍼니’의 규약에 예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자 필그림 지도자들은 자치권을 규정하고 있을지 모를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메이플라워 협약을 이끌어내었다.

수익 창출에 안간힘을 기울인 플리머스 식민지

이익을 올려야하는 회사 입장에서 식민지의 사업은 필그림들이 씨 뿌려야하는 뉴잉글랜드의 척박한 토양만큼이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혹독한 첫 해 겨울을 보낸 후 번성은커녕 살아남는 데 급급해야했다. 결국 메이플라워 호는 영국에 빈 배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가올 시련의 서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초기 투자자들은 필그림들이 고국에 보낸 결과물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먼 타겟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털가죽, 목재, 어류 등을 보내기로 되어있었지만, 배가 가라앉거나 해적의 습격을 받는 일까지 발생했다. 결국 투자자들은 한 푼도 이득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영국 본토에서 중절모나 기타 사치품 액세서리에 들어가는 담비 가죽이 엄청난 인기를 끌자 플리머스 식민지는 마침내 재정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과 담비는 신생 식민지의 두 대들보였다.”

역사가 제임스 트르슬로우 아담스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성경은 정착민 사회의 규율을 담당했고, 담비는 경제를 책임졌다. 그렇더라도 담비의 역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퓨리턴들이 도래하고, 1630년대 매사추세츠 만에 식민지가 건설되자 비버 가죽을 향한 경쟁이 치열해졌고, 필그림들의 근본이 흔들렸다. 필그림들은 1648년이 되어서야 부채를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궁극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식민지 기업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1691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가 결성될 때 다른 식민지들과 통합됨으로써 거대한 기업에게 먹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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