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프리즘] 영국 대처 총리가 강성 노조를 물리치고 ‘철의 여인’으로 불리기까지
[노동 프리즘] 영국 대처 총리가 강성 노조를 물리치고 ‘철의 여인’으로 불리기까지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11.21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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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석탄 광부들 전국적인 파업... 한치도 물러서지 않아
"그녀를 잃어 너무 슬퍼요" (AP=연합뉴스) 2013년 4월, 영국 런던 벨그라비아에 있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자택 앞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사진과 꽃 등이 한가득 놓여있다.
"그녀를 잃어 너무 슬퍼요" (AP=연합뉴스) 2013년 4월, 영국 런던 벨그라비아에 있는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자택 앞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사진과 꽃 등이 한가득 놓여있다.

전세계가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어느 시대나 구조조정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나 기업이나 새로운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구조조정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이를 회피하다가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치달은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대의(大義)를 위한 정치인의 소신이 어떻게 현실에 반영돼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강력한 정치적 판단 뒤엔 얻는 것과 함께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대처가 1979년 영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영국은 경기 침체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업들은 도산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대처는, 국가에 예속되지 않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 활동에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근거해 즉시 경기를 선순환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녀가 총리 직에 취임했을 때 목표는 ‘의존적인 사회에서 자립적인 사회로, 공짜를 바라는 국민에서 스스로 자립하는 국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대처는 국영기업들을 민영화시키는 일부터 착수했다. 이러한 기업들에는 정부 보조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철강이나 석탄 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아가 영국 산업 노조들에 재갈을 물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1970년대에는 ‘전국석탄광부노조(NUM)’가 일으킨 파업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연료 부족이 발생하면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일이 빈번했다. 대처는 이 파업의 영향으로 이전의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 정권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지켜보면서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영국 석탄광부들의 파업 투쟁의 한 편에는 1981년 NUM 의장 자리에 오른 아서 스카길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4년 전국적인 광부 파업 때 요크셔 주 광부노조를 대표하던 그는 과격한 투쟁 전략을 내세워 파업을 성공으로 이끌며 파업 투쟁의 선도자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전략 중에는 석탄 수송을 방해하기 위해 타지역 노동자들을 지원해서 함께 투쟁하는 방법들이 유명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파업 발발

1984년 3월 6일, ‘전국 석탄산업 연합회’는 연간 3억4000만 달러에 이르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석탄 생산량을 4백만 톤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영국에는 170개의 석탄 광산에서 190,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아서 스카길과 NUM 측은 석탄산업 연합회의 결정에 따라 20개의 광산이 문을 닫고, 약 20,000명의 광부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생산 감축 계획이 발표되던 같은 날 사우스요크셔 주의 한 광산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스카길은 이 기회를 광산 폐쇄를 막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이때 스카길은 전국 파업을 결정하기 위해 NUM 내에서 투표를 거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으며, 전국의 모든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광부들이 그대로 일을 함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에 노노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스카길의 과격한 투쟁 전략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많은 광산들이 생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달리 대처 총리는 파업을 대비해 영국이 적어도 6개월은 돌아갈 수 있도록 석탄과 코오크 비축에 나선 상태였다. 그녀는 또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트럭 운전수들과 협정을 맺고 석탄 수송에 만전을 기했다. 이로써 이전과는 달리 석탄 광부들의 파업 때문에 나라가 멈추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광부들과 경찰 간의 폭력

파업 중인 광부들은 대처 정부의 후원을 받은 경찰들과 충돌했고, 폭력 사태로 비화되는 일이 잦았다. 대치 국면은 양측에 필사적이었다. 스카길은 이 파업을 나치 독일과 싸우는 영국에 비유했으며, 대처 총리는 이번 기회를 활용해서 호전적인 노조를 영원히 추방시키고자 했다. 2014년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대처는 석탄 수송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정부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 비상사태의 선언까지 고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는 사우스요크셔에서 벌어졌다. 1984년 6월 18일, 오그레브의 브리티시 스틸 코오크 공장에서는 10,000명의 광부들과 5,000명의 경찰 사이에 폭력 사태가 벌여졌다. 대치 국면이 끝나고 폭력의 연기가 걷히자 광부 51명과 경찰 72명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오그레브의 전투’라고 불렀다. 광부 노동자 수십 명이 체포되었지만, 검찰은 이들을 기소할 수 없었다. 경찰이 증거를 조작하는 등 잘못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2013년 4월, 영국 노동계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소식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집권 당시 파업 강경 진압으로 큰 피해를 본 노동계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싸늘한 반응을 내놨다. 일부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대처 전 총리의 죽음을 환호하며 시위를 벌였다. (AFP=연합뉴스)
2013년 4월, 영국 노동계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소식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집권 당시 파업 강경 진압으로 큰 피해를 본 노동계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싸늘한 반응을 내놨다. 일부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대처 전 총리의 죽음을 환호하며 시위를 벌였다. (AFP=연합뉴스)

파업의 유산

파업이 지루하게 이어졌어도 대처 정부는 단호했다. 그 와중에 노팅엄셔와 사우스레스터셔 노동자들이 ‘민주 석탄광부노조’라는 경쟁 노조를 만들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광부들이 일터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1985년 3월 3일, 스카길과 NUM은 362일의 파업 끝에 투표를 통해 파업을 종료하기로 결의했다. 광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브라스밴드와 퍼레이드를 벌이며 광산에 복귀했다.

파업 철회에 따른 협정은 없었으며, 대처 정부는 단 한 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대처 총리의 이 같은 강경 태도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 이 칭호는 1970년대 구소련의 언론이 그녀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대처는 보수당이 세 번이나 연속해서 총선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낳게 했으며, 그녀 자신도 20세기 영국의 어떤 정치인보다 긴 11년이나 총리직을 역임했다.

1984년과 1985년 광부들의 파업 실패는 영국 경제가 되살아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광부 노동조합과 석탄 산업 측면에서는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노조 가입률은 전국 노동자 기준으로 약 40%에서 20%를 간신히 유지할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이 비율은 이후 몇 십 년 사이에 더 떨어졌다.

석탄 산업이 완전히 민영화된 1994년이 되자 영국의 광산은 15군데로 줄어들었다가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는 3개만이 남았다. 이 광부들의 파업과 석탄 산업 붕괴의 부정적 영향은 다음 세기까지 지속되는 정부에 대한 반감과 경찰력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영국의 석탄 산업 지대였던 지역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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