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사이드] 1918년 독감이 미국에서는 잊혀진 팬데믹이 된 이유
[월드 인사이드] 1918년 독감이 미국에서는 잊혀진 팬데믹이 된 이유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11.18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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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이 잠잠해지고 나자 이 전염병에 대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1918년 10월 미국의 모습. [사진=미국 CDC 홈페이지]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1918년 10월 미국의 모습. [사진=미국 CDC 홈페이지]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100년 전의 팬데믹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스페인독감이라고도 불리는 1918-1919년의 인플루엔자는 엄청난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이 전염병 때문에 세계 인구의 1/3이 감염되고, 5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다른 유형의 인플루엔자와는 다르게 당시의 인플루엔자는 특히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청장년층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는 많은 아동들에게 부모 모두나 부모 중 하나를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의사와 과학자들은 감염병이 정복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는데 이 팬데믹으로 그 믿음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인플루엔자가 잠잠해지고 나서는 아무도 이 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저는 미국 역사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1919년이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였다고 말합니다.”

스토니 브룩 대학의 저명한 역사학 교수인 낸시 톰스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팬데믹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다.

1919년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후 심각한 경기침체에 접어들고 있던 해였다. 미국은 그 해에도 여전히 인플루엔자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상 최초로 벌어진 시애틀의 총파업을 포함해서 전국적으로 파업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1919년 여름을 강타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Red Summer)’를 앞세워 백인 폭력단들은 흑인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을 위해 싸웠던 이들 흑인들의 상당수는 사회적 불평등에 좌절감을 느끼고 백인들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최초로 찾아온 ‘빨갱이 공포증(Red Scare)’의 와중에 미국 법무부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파 사건에서 좌파들을 소탕하기 위해 ‘파머 습격(Palmer Raids)’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떠하든 미국인들은 팬데믹 당시의 경험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팬데믹에 대해 말하거나 기록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이후 세대들은 이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이후 태어난 역사가 알프레드 크로스비는 이러한 상황을 1974년 펴낸 자신의 저서 제목을 통해 ‘미국의 잊혀진 팬데믹’이라고 불렀다.

의사들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던 팬데믹

1918년의 인플루엔자 환자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1918년 3월 캔자스 주의 육군병원에서 였다. 그해 늦여름과 초가을이 되자 인플루엔자가 두 번째로 창궐하게 되었다. 이번 것은 더 치명적이었고, 특히 매사추세츠 주의 캠프 데벤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캠프에 거주하던 15,000명 중 1/3 정도가 감염되었으며, 800명이나 사망했다.

빅터 본은 이 전염병의 창궐을 직접 목격한 의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1926년 펴낸 책 『어느 의사의 회고록』에서 이 역사적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인플루엔자는 세계를 휩쓸고, 세상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군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건장한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앗아갔습니다. 이놈은 과학의 면전에 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것입니다.”

1918년 이전에는 빅터 본을 포함한 많은 의사들은 감염병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감염병이 미국인 사망률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의약품의 발달과 위생의 개선 덕택으로 언젠가는 이 질병들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찾아든 인플루엔자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인플루엔자가 창궐하자 빅터 본 박사는 자신의 직업과 현대 의학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퓨젓 사운드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미국 팬데믹 : 1918년 인플루엔자의 잊혀진 세계』의 저자이기도 한 낸시 브리스토우는 이렇게 말했다.

1918년의 인플루엔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의사들의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보기 힘들다. 팬데믹 기간 육군 의무부에서 일을 했던 한스 진서 박사도 1935년 출간한 책 『쥐, 이, 그리고 역사』에서 이 전염병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100년 동안이나 인플루엔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이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열풍 :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에 퍼진 인플루엔자』를 쓴 캐롤 바이얼리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우리는 인플루엔자를 빼고는 그렇게 많은 감염병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캠프는 그 인플루엔자 전염병을 제외한다면 아주 훌륭하게 대처를 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인플루엔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 것은 의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인플루엔자를 겪은 이야기를 말하거나 기록으로 남기기를 싫어했다.

팬데믹을 다룬 신문 기사들도 일반적으로 사망자나 생존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싣지 않았다고, 미시건 대학 의학 역사 센터의 부국장이자 『1918-1919년의 미국 인플루엔자 : 디지털 백과사전』의 공동저자인 알렉스 나바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특히 인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팬데믹이 창궐했던 도시들에 대한 기사를 수천 건은 검토했을 겁니다. 신문 기사들 중 일반 대중들의 개인적 비극을 다룬 것들이 얼마나 적은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바로는 이 중 시카고에 살았던 안젤로 파듈라라는 사람에 대해 들려주었다. 파듈라는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가족들을 위해 의사를 부르려고 밤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도와줄 사람을 아무도 찾을 수 없자 파듈라는 시카고 강에 투신해 빠져죽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역사가들은 1918년을 다룰 때, 인플루엔자가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루엔자 자체보다 세계대전에 더 집중했다. 1919년의 대혼란도 팬데믹의 특정한 상처를 지워버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이는 역사적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팬데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가 상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정말 심각한 상처를 경험할 때 그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낸시 브리스토우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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