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 미국에서는 흑백 통합 지방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가 벌어진 적이 있다
[미 대선] 미국에서는 흑백 통합 지방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가 벌어진 적이 있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10.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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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예정된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행사장 근처에서 경찰이 인종차별 규탄 시위대를 연행하려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AFP연합뉴스)
지난 8월,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예정된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행사장 근처에서 경찰이 인종차별 규탄 시위대를 연행하려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AFP연합뉴스)

내달 치러지는 미국의 2020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할 경우, 미국은 소송전에 휩싸이는 것은 물론 보수-진보 진영간 극심한 대결로 유혈 충돌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 역사에는, 희미한 기록으로만 남아있지만, 인종 테러를 동반한 쿠데타가 발생해서, 지방의 정부가 전복됐던 흔적이 남아있다.

1898년, 남부에서 가장 진보적이며 흑인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던 도시인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에 흑백 통합정부가 새롭게 탄생했다. 이에 분노와 두려움을 느낀 백인 자경단은 그 지역 민병대와 결합해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도시의 백인 지도자들은 흑인들이 통치하게 되면 도시의 삶이 송두리째 뒤집어지고, 여성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불어 닥칠 것이라고 공포를 조장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케이프피어 강을 흑인들의 시체로 물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학살극이 종료되었을 때는 100명 이상의 흑인 시정부 관리들이 선출된 자리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졌고, 60명에서 250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살해되었다. 직위에서 쫓겨난 흑인 공무원들에는 시의회 의원, 시 공무원, 재무담당관, 시 법률담당관 등이 있었다.

이 쿠데타로 기소되거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10만 명 이상의 흑인 등록 유권자들만이 도시를 떠나야했다. 그 이후 이 도시의 관청에서는 75년 동안 흑인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종 학살이었습니다.”

이 폭동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불타는 윌밍턴’의 감독인 크리스토퍼 에버렛은 이렇게 말했다.

“100년 이상 침묵 속에 은폐된 대량 학살극이었습니다.”

번성했던 윌밍턴 흑인 공동체

1898년까지 이어지는 몇 해 동안 윌밍턴은 미국 남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흑백이 조화롭게 통합되고, 사람들이 번성했던 항구 도시 윌밍턴은 남북전쟁 이후 새로운 남부의 이상향이 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윌밍턴에서는 1896년까지 거의 126,000명의 흑인들이 유권자로 등록되어있었다. 이 도시의 번성했던 흑인 중산층 중에는 약 65명의 의사들과 변호사들, 교사들이 있었으며, 이발사들이나 식당 주인들, 그리고 공중보건 관리들과 경찰관 및 소방관들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노예해방이 선언된 지 30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흑인 공화당원들이 시의회 의원이나 행정장관 등 기타 선출직의 다수를 차지했다.

이 지역의 독특한 흑백 통합의 상징이 되었던 ‘퓨전당(Fusion Party)’은, 주로 가난한 백인 농민들로 구성된 ‘포퓰리스트당’과 해방된 미국 흑인들이 소속된 ‘공화당’이 만들어낸 정치적 산물이었다. 그들은 민주당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했다. 당시 미국 민주당은 부유한 백인 분리주의자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가난한 백인 포퓰리스트 당원들은 민주당의 백인들이 보통사람들보다 금융가들이나 철도업자 같은 부자 유권자들을 대변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인 포퓰리스트 당원들과 흑인 공화당원들이 연대해서 윌밍턴 지역의 정권을 잡고, 1894년 공화당이 민주당을 몰아내고 지역과 연방 정계에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백인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음모

백인 지배력 상실을 우려한 윌밍턴의 민주당원들은 권력을 되찾고 흑인들에게 빼앗긴 정치·경제적 기반들을 탈환하기 위해 다각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최대 일간지였던 <뉴스 앤 업저버>의 편집인 조지퍼스 대니얼스와 나중에 주지사가 되는 찰스 에이콕, 그리고 전직 남부연합군이자 국회의원이었던 무어 와델을 비롯한 주(州)와 지역의 힘 있는 민주당원들은 퓨전당의 백인들을 꾀어내고자 획책했다. 1898년 발간된 민주당의 편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미국은 백인의 나라이므로 백인들이 통치해야한다.”

당파적 언론을 통해 증폭된 갈등

대니얼스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흑인들의 위협’에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이 신문은 퓨전당 구성원 대부분이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의 정당 때문에 노스캐롤라이나 주가 전복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부채질하고, 백인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흑인들을 그린 만화나 이야기들을 전파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노스캐롤라이나 신문 한 곳도 나중에 상원의원이 되는 레베카 펠튼이라는 작가의 글을 실었다. 그녀는 백인 여성들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흑인들에게 매일 린치를 가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펠튼의 선동은 윌밍턴의 유력 흑인 언론의 편집자 알렉스 맨리를 분노하게 해서, 이에 대한 혹평을 쓰도록 만들었다. 맨리는 1898년 11월의 선거 몇 주 전에 게재된 칼럼을 통해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덩치 큰 흑인 야만인’에 의해 백인 여성들이 성폭행당하는 이야기들을 정면으로 되받아쳤다. 그는 혼혈 남성들과 합의적인 성관계를 즐기는 백인 여성들이 존재하는 복잡한 현실을 꼬집었다. 이때 그가 언급한 혼혈 남성은 무력한 흑인 여성을 백인 남성이 성폭행해서 태어난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목할 점은 맨리 자신도 백인 주지사 할아버지를 둔, 갈색 피부의 혼혈이었다는 점이었다.

“강물을 맑게 하고 싶다면 펠튼은 원천부터 정화시켜야 할 것이다.”

맨리는 이렇게 썼다.

“그대들 백인 남성들부터 정화시키라 …… 백인 남성들에게,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와 성교하는 것이 백인 남자가 유색인종 여자와 성교하는 것보다 결코 더 더럽지 않다고 알려주라.”

몇 주 뒤, 10월에 무어 와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면서 도발의 수위를 높였다.

“우리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있음을 그들에게 영원히 각인시키자. 케이프피어 강을 흑인들의 시체로 물들여야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흑인에 의한 지배는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기억일 뿐이다. 이 상황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영원히 경고를 발해야한다.”

11월 선거가 다가오자 윌밍턴의 백인들은 민주당의 선동에 의해 완전히 흑인들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러고 나서 폭력이 찾아들었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것을 애도하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주민들이 그가 경찰에 연행됐던 현장에 마련된 임시 추모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것을 애도하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주민들이 그가 경찰에 연행됐던 현장에 마련된 임시 추모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쿠데타와 테러로 얼룩진 유세

선거 유세 기간 동안 백인 경찰들은 흑인들의 집을 급습해서 폭력을 휘두르며 선거에 참여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선거 당일 날에는 무장한 백인 폭력단들이 윌밍턴 투표소들 앞에 진을 치고 흑인들의 선거 참여를 방해했다. 그 결과 백인들이 입후보한 모든 선거구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백인 민주당원들은 일단 정치권력을 등에 업자 두 번째 목표의 실행에 나섰다. 윌밍턴 흑인들의 경제력을 침탈하고 백인우월주의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부정선거가 저질러진 다음 날, 윌밍턴의 민주당원들은 ‘백인 독립선언서’를 발간했다.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다시는 아프리카 혈통의 인간들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성명서는 윌밍턴의 흑인들에게서 선거권을 빼앗고, 흑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일자리들을 백인 유권자들에게 돌려주고, 린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알렉스 맨리는 도시를 떠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맨리는 북부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수백 명의 무장 군중들은 맨리가 발간하는 신문 <더 데일리 레코드> 사무소와 인쇄소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그런 다음 폭도들은 시청까지 행진해서 정당한 절차로 선출된 공화당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을 사임하도록 했다. 새로운 시장 자리는 무어 와델이 차지했다.

쿠데타 발발 이후 군중들의 숫자는 2,000명까지 늘어나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임명된 인종차별적인 경찰력과 주 민병대의 후원을 받은 폭도들은 권총과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최소 60명의 흑인들을 살해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윌밍턴의 흑인들은 주정부와 백악관에 탄원해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구하지 못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쿠데타

폭도들은 흑인들을 살해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윌밍턴의 모든 중산층 이상의 흑인들이 사실상 도시를 떠나도록 강요했다. 흑인 권력층이 사라지자 새로 들어선 지역 정부는 짐 크로우 흑백분리 정책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이 쿠데타로 인해 흑인들의 정치·경제적인 입지는 윌밍턴에서 거의 100년 동안이나 발을 붙이지 못했다. 1902년이 되자 등록된 흑인 유권자들의 숫자는 125,000명 이상에서 약 6,100명으로 줄어들었다. 또, 쿠데타 이후 1972년까지 윌밍턴에서는 어떤 흑인도 공무원으로서 일을 하지 못했다. 윌밍턴에서 흑인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1992년까지 기다려야했다.

“오늘날까지 흑인 중산층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윌밍턴의 거짓말』의 저자인 데이비드 주치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쿠데타는 이 도시에 영원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윌밍턴은 흑인들에게는,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설 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신문들이나 미디어, 그리고 주가 운영하는 기관들은 쿠데타가 벌어진 직후부터 100년 이상을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일방적인 쿠데타 원인의 일부를 흑인들의 선동 때문에 발생한 인종 분쟁으로 묘사해왔다. 나아가 와델이나 대니얼스, 그리고 에이콕 같은 쿠데타 주동 인물들의 상당수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

윌밍턴의 쿠데타로 체포되거나 기소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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